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문단 편집) === 수라바야, 암바라와 전투 === {{{#!wiki style="float:center;text-align:center" [[파일:Bung_Tomo.jpg|width=400]][br]수라바야 전투를 상징하는 붕 토모[* Bung Tomo, '토모 동지' 내지 '토모 형제'. 본명은 수토모(Sutomo). 독립전쟁 과정에서 독립을 지지하는 열정적인 라디오 연설로 유명했다.]의 사진.[br](《난양 포스트》 1947년 2월자)}}} > "어이 영국군 놈들! 우리 인도네시아 청년, 인도네시아의 성난 황소들에게 흰옷을 적실 붉은 피가 흐르는 한 우리는 절대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동지들이여, 투사들이여, 인도네시아 청년이여, 우리는 계속해서 싸운다. 우리는 사랑하는 조국 인도네시아 땅에서 식민주의자를 모두 몰아낼 것이다. 오래도록 우리는 고통받고, 착취당하고, 짓밟혔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독립을 쟁취할 시간이다. '''자유 아니면 죽음을! 신은 가장 위대하시다('Allahu 'Akbar)!... 신은 가장 위대하시다!... 신은 가장 위대하시다!... 자유를!'''" >---- >수라바야 전투 중 붕 토모(당시 25세)의 연설, 1945년 11월 9일. [[수라바야]]에서 영국군은 독립 지지파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다. 수라바야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자카르타 다음 가는 제2도시로서[* 독립전쟁 발발 전 1945년 인구 기준으로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큰 세 도시는 자카르타(인구 847,483명), 수라바야(618,674명), 반둥(약 48만 명)이었다.(Freek Colombijn, "Under Construction: The Politics of Urban Space and Housing during the Decolonization of Indonesia, 1930-1960", 2010) 동남아시아 전체에서도 당시 수라바야보다 큰 도시는 자카르타 외에는 [[방콕]], [[양곤]], [[사이공]], [[싱가포르]], [[마닐라]]뿐이었다. 마닐라는 [[필리핀 탈환전|전쟁 때문에]] 1945년에는 인구 집계가 어려웠다. 마닐라 전투(특히 [[마닐라 대학살]])에서의 인명 손실 및 피난으로 인구가 감소해 1945년 마닐라는 일시적으로 수라바야보다 인구가 적었을 수도 있다.] 도시 그 자체로 중요했고 주요 항구와 공군 기지가 있어 전략적으로도 자바 동부에서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다. 수라바야를 일단 관리했던 일본군 중장 시바타 야이치로는 10월 3일 도시로 온 연합군 대표인 네덜란드군 대령에게 항복했지만, 동시에 인도네시아 독립파에게 동조하였고, 독립파에게 일본군의 남은 무기를 나눠 주어 인도네시아군의 무장을 도왔다. 이어 10월 내로 파견된 영국군이 수라바야에 도착했고 인도네시아군과 교섭하며 궁극적으로 인도네시아 측 무장 해제를 요구했다. 열정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독립군 연설가 붕 토모(Bung Tomo, 1920 ~ 1981)의 애국적 라디오 연설이 연거푸 흘러나오는 가운데 인도네시아군과 민병대, 많은 인도네시아인들 사이에서는 혁명의 열기가 끓어올랐다. 지속적 협상에도 불구하고 양측 간 오해와 불신이 겹치고 현장을 통제할 수 없게 되어 결국 10월 27일 영국군과 인도네시아군 간 전투가 시작되었다. 수카르노와 [[모하맛 하타|하타]]는 상황을 통제하려 애쓰면서 전투 개시 후 10월 30일 영국군과의 휴전을 가까스로 이끌어냈지만 10월 30일 휴전 합의 직후 영국군 [[준장]] 오버틴 월터 소던 맬러비(Aubertin Walter Sothern Mallaby, 1899 ~ 1945)가 현장의 영국군에게 휴전 소식을 알리려고 이동하다가 전투 중이던 인도네시아 민병대와 조우해 피살되면서 휴전은 불가능해졌다. 이 수라바야 전투(1945년 10월 27일~11월 20일)에서 영국군은 12만 명에 달하는 독립군(10만 정도는 무장 수준이 빈약한 민병대)에 맞서 최대 3만 명의 정규군 및 해군의 엄호와 [[전차]][* 초기 동원된 전차는 [[M4 셔먼]] 24대, 비슷한 수의 [[M3 스튜어트]] 등이었고 나중에 증원되었다.]와 [[전투기]]를 동원해서 처음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힘겹게 승리했다. 영국 측 사상자는 최소 600명, 최대 4000명 이상이었다. 무장과 훈련이 빈약했던 인도네시아군은 훨씬 큰 피해를 입었는데 전사자는 6,000~16,000명이었고, 20,0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그 밖에도 20만 명에 달하는 수라바야의 민간인들이 피난을 갔다. 한편 중부 자바의 암바라와(Ambarawa)에서 벌어진 암바라와 전투(1945년 10월 20일~12월 15일)에서는 영국군이 처음에는 독립군의 저항 없이 주둔한 일본군을 무장 해제하고 암바라와 지역을 점거했지만 11월 말 시작된 독립군의 조직적인 공격으로 전투에서 패배하여 암바라와를 인도네시아군에 넘겨주고 퇴각하고 만다. 자바에 도착해 인도네시아군과 전투를 치른 영국군 일부도 동요하고 있었다. 영국군 병사들은 인도네시아 공화국이 그저 일본군 부역자들이 세운 단명할 괴뢰국이고 이상한 사상을 따르는 극단주의자들에 불과하다는 편향된 네덜란드 측 정보를 접하고 전선으로 나갔다. 즉 당시 영국군들 입장에서 '''독립파는 '인도네시아 국민'이 아니라 '[[추축국]]의 잔당'이라고 교육받고 작전에 투입'''되었다. 직전까지 독일, 일본 등 추축국들과 싸워 나갔던 영국군인 만큼 그 잔당을 소탕한다고 하니 전쟁 초기 영국군의 사기는 당연히 좋았다. 하지만 막상 현지에서 싸우다보니 정작 자기들이 싸운 상대는 진심으로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원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을 침략자로 인식하고 죽기살기로 처절하게 대항했던 것이다. 자바에 동원된 [[인도 제국]]군은 자신들 역시 식민지인이라는 점에서 스스로 모순을 느끼기도 했으며 아예 인도네시아군으로 전향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여러 전투 현장에서 인도네시아군과 동행하며 친인도네시아 영어 라디오 방송을 진행한 일명 '수라바야 수'(Surabaya Sue), 크툿 탄트리(K'tut Tantri)[* 미국인. 본명은 뮤리얼 스튜어트 워커(Muriel Stuart Walker, 1898 ~ 1997). '수라바야 수'는 영국군과 네덜란드군이 [[도쿄 로즈]]처럼 붙인 별명이다.]도 나중에 수라바야 전투를 회고하면서 이러한 영국군의 동요와 [[인지부조화]]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러한 결과를 받아든 영국은 동인도의 독립 투쟁이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판단을 유보하고 이에 대한 정보를 전면적으로 재점검하게 되었다. 결국 영국은 독립파가 추축국의 잔당이라는 판단이 오판임을 인정하고 네덜란드 식민지 유지는 불가능한 만큼 [[인도네시아]]를 독립시킨 뒤 친서방 진영으로 편입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영국 세력은 1946년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사이의 협상을 중재하면서 1946년 11월과 12월을 거쳐 군대를 모두 철수시켰다. 인도네시아군으로 전향한 인도 제국군의 수는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대부분 수라바야 전투에서 발생했고 무슬림이 대부분으로 6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들 가운데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이 끝난 후 죽거나 실종되지 않고 남은 인원은 75명뿐이었다. 전쟁 후 고향으로 돌아간 전향자도 있었지만, 많은 인도 제국군 전향자들은 인도네시아 독립 후 인도네시아에 남기를 선택했고, 새로 정비된 인도네시아군에 정식으로 편입되었다.[[https://www.milligazette.com/news/7-analysis/3662-indian-muslim-soldiers-heroic-role-in-indonesias-liberation/|출처]] 수라바야 전투에서 영국군이 맬러비 준장의 피살에 대한 대규모 보복 공격을 벌여 인도네시아군이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11월 10일은 이후 인도네시아에서 '영웅의 날'(Hari Pahlawan)로 지정되었으며 인도네시아의 국가 기념일 중 하나다. 자바 동부나 수라바야에서는 이 11월 10일을 단체명으로 따 오거나 여러 가지 방식으로 특별히 기념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오늘날 수라바야에 소재한 인도네시아 명문 공대의 명칭이 바로 '[[11월 10일 공과대학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